삼국유사 저자 일연은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을 찾는 것을 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과거의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문화적 배경이 고려사회 전반에 전개되고 있던 데에 그 토양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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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민족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외세의 압력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사관적 역사의식이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사관을 강하게 반영하는 사서가 삼국유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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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김부식이 편찬한 책으로 신라 계승의식을 반영하고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쓴 역사책입니다.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고조선 및 삼한의 비기록, 삼국사(신라중심) 내용입니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저술한 책으로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여 고유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여 저술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습니다.

기사본말체 형식으로 단군부터 고려말 충렬왕 때까지 기록하였으며 신라 관계 기록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 책의 공통점으로는 쓰여진 시점이 고려시대라는 것이 같습니다. 자세하게는 삼국사기는 고려중기, 삼국유사는 고려말기입니다..

단군신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건국 신화(建國神話)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국조전설(國祖傳說)이라고도 합니다.

원시시대부터 민간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으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말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의 제1권 고조선 조(條)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위서』(魏書)에는 단군 임금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썼으니 중국 요(堯)와 같은 시대(B. C. 2333)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할 때,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白)을 보아 홍익인간(弘益人間 :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할 만하다 생각하여 그들에게 천부인(天府印) 3개를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여러 신들과 세상을 다스렸다고 하는데요 이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하여 환웅은 쑥과 마늘만으로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참을성 많은 곰만이 100일을 견뎌내 사람이 되었고(熊女), 환웅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이라는 것입니다.

단군이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고, 뒤에 아사달에 천도하여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의 단군 신화는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도 나타났습니다. 단군 신화의 사상은 상고(上古)의 민간 신앙에서 나오는 것으로 선왕당(仙王堂)ㆍ천왕당(天王堂)ㆍ산신당(山神堂) 등 천신숭배ㆍ산신숭배의 사상과 합치되어 있습니다. 단군 숭배 사상은 고려 충렬왕 무렵에 원(元)에 대한 자립 의식으로부터 싹터, 조선 세종 때 평양에 단군 사당을 지어 동명왕(東明王)과 더불어 추앙하였으며, 구한말 자주 독립사상이 고조될 때 발생한 대종교(大倧敎)ㆍ단군교(檀君敎)의 성립 배경이 되었습니다.

유교, 불교, 선교(仙敎:道敎)의 유입 이후 단군 신화의 사상을 3교의 모태로 보기도 하며,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환검(檀君)을 3신(三神)이라 하는 삼신사상이 싹트기도 하였습니다.

화랑도의 기본정신은 세속오계입니다.

 

세속오계는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圓光)이 화랑에게 일러 준 다섯 가지 계율을 의미합니다.
이 세속오계에는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 있습니다

사군이충 - 임금을 충성으로써 섬김.
사친이효 - 어버이를 섬기기를 효도로써 함.
교우이신 - 벗과 벗 사이엔 믿음이 있어야 함.
임전무퇴 - 싸움에선 절대 물러나지 아니함.
살생유택 -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아니함.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처음에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 하고, 이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고 그 설치목적과 수양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이로써 화랑도의 설치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 인재를 가려서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소기(所期)의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는 ‘현좌(賢佐: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합니다. 그 설치연대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高靈)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제27대 왕,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 성 김(金), 휘(諱) 덕만(德曼), 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시호는 선덕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신라뿐 아니라 기록에 나타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었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인데, 덕만은 불교식 이름으로 『열반경』에 등장하는 오계를 갖춘 재가 여신도이며 부처의 열반을 지켜보았다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이고 어머니는 복승갈문왕의 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며 자매로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혼인하여 김춘추를 낳은 천명부인이 있다. 또한 ‘서동요’설화에서는 백제로 가서 무왕의 비가 되었다고 하는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셋째딸이라 하여 선덕여왕의 자매로 그려져 있다.

<삼국유사> 기록을 믿기 어려운 점은 또 있다. 즉, 진평왕의 딸이 세 명으로 정사 기록대로 첫째 딸이 선덕여왕이고, <삼국유사> 말대로 셋째가 백제 무왕에게 시집갔다면 둘째 딸이 선덕여왕 다음 왕으로 즉위해야하나, 그 어떠한 말도 없다는 점이다. 선덕여왕 다음으로 왕이 되는 승만은 진평왕의 둘째 딸이 아니라 덕만(선덕여왕)과 4촌이라는 점이다. 고로 선화공주가 진평왕 셋째 딸이라는 근거는 <삼국유사>의 기이편(奇異編) 설화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상 여왕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632~647)외에 두 명이 있었다. 제28대 진덕여왕(647~654), 그리고 통일 신라 말기에 해당하는 제51대 진성여왕(887~897)이다. 이 세 여왕은 모두 신라의 여왕이다. 고구려, 백제와는 다른 신라의 정치, 사회적 특징은 유일하게 신라에서만 여왕의 존재를 낳게 한다. 먼저, 그 이유가 바로 신라사회에서만 존재했었던 골품제의 영향이다. 원래 신라의 왕위는 부모 양쪽이 모두 성골이어야만 하는 극소수의 성골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였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으로 성골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7세기에 들어서면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성골은 진평왕의 딸 덕만(후일 선덕여왕)과 조카딸 승만(후일 진덕여왕)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성골남자가 없다는 것은 성골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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